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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돈이 없어졌습니다. 철도 없습니다. 집은 망했고, 앞날은 깜깜한데 정신 못 차리는 날이 계속되었습니다. 노력하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 취직도 했지만 소용이 없었습니다. 월급이 늘어가는 빚과 이자를 감당하지 못했습니다. 그즈음 현재 음악평론가 및 번역가로 활동하는 친한 동생의 집에 놀러 간 적이 있습니다. 나는 내 인생의 가장 참혹했던 이 시절 이 친구의 서재에서 삶의 좌표가 되어줄 작가와 처음으로 만났습니다. 작가의 이름은 김훈, 책 제목은 자전거 여행입니다.
자전거 여행을 다 읽고 난 후 나는 김훈이 쓴 모든 책을 싹 다 찾아서 읽고, 또 읽었습니다. 그가 쓴 수필을 읽었고, 칼의 노래를 비롯한 모든 소설을 읽었습니다. 그가 박래부 기자와 함께 작업한 문학기행을 읽은 뒤에는 사진가 허용무 씨가 참여한 책 원형의 섬 진도를 읽었습니다. 그렇습니다. 나는 김훈이라는 세계 자체를 먹으려 했습니다. 내 인생 최초의 글 폭식인 것입니다. 그가 연필로 꾹꾹 눌러쓴 문장 몇 개가 지금도 내 몸을 둥둥 떠다닙니다. 먼저 남한산성의 서문 중 다음 문장을 언급해야 마땅합니다. 나는 아무 편도 아닙니다. 다만 고통받는 자들의 편입니다. 카프카는 책은 도끼가 되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얼어붙은 땅을 쩍 하고 갈라버려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렇다면 저 문장은 나에게 도끼 정도가 아니었습니다. 가히 토르의 묠니르요, 스톰 브레이커였습니다. 저 문장이 뿜어내는 쾅 소리와 함께 내 정신은 산산조각이 났습니다. 충격과 희열로 온몸이 부르르 떨렸습니다.
모든 글 쓰는 사람에게 별이 되어준 문장, 하나씩은 있을 것입니다. 나에게는 저 문장이 곧 횃불이었습니다. 나는 지금도 인간의 개별성을 깊이 이해하고, 연민하는 작가를 사랑합니다. 같은 이유로 글을 무기로 우리를 갈라치는 글쟁이를 대체로 혐오합니다. 내 집 사정이 영향을 미쳤다고 추측할 수 있습니다. 깜깜했습니다. 아빠와 단둘이 지하에 살았습니다. 볕이라고는 하나도 들지 않는 그곳에서 수년을 버텼습니다. 유년 시절에는 정반대였습니다. 나는 어렸고, 세상은 장난감과도 같았습니다. 잘 먹고, 잘 살았습니다. 상황이 변한 것은 대학 시절부터였습니다. 최소 10번 이상의 이사가 이어졌고 횟수가 거듭될수록 당연히 다운그레이드. 먹고살기가 팍팍해졌습니다. 다시, 김훈입니다. 그의 또 다른 인터뷰를 적겠습니다. 나는 문학이 인간을 구원하고, 문학이 인간의 영혼을 인도한다고 하는, 이런 개소리를 하는 놈은 다 죽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문학이 무슨 지순하고 지고한 가치가 있고, 인간의 의식주 생활보다 높은 곳에 있어서 현실을 관리하고 지도한다는 소리를 믿을 수가 없습니다. 나는 문학이란 것을 하찮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가 옳습니다. 한데 문학만은 아닙니다. 음악, 영화, 미술, 게임 다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엄격히 말해 문화예술이라는 것은 의식주가 해결되고서야 손에 쥘 수 있는 보너스 같은 것입니다. 불만이 없지는 않지만 여러분도 그렇지 않을까? 한국 사회의 물질에 대한 끝 모를 탐욕, 지긋지긋할 때 있지 않을까? 그럼에도 김훈이 강조했듯 그 어떤 예술이든 실재하는 삶보다 위중할 수는 없습니다. 결단코 그럴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나는 기억하고 있습니다. 위로가 필요했던 그 시절 만났던 그 노래를 잊지 않고 있습니다. 바로 그곳은 안토니 앤 더 존슨스(Antony & The Johnsons)의 Hope There's Someone'을 들으면서 나는 침대에 누워 대성통곡했습니다. 그것은 격함을 넘어선, 뼈에 사무치는 듯한 울음이었습니다. 한데 기묘했습니다. 어느 순간 눈물이 딱 멈추더니 고개가 위로 들렸습니다. 창문 너머에서 달빛이 희미하게 일러이고 있던 새벽이었습니다. 일종의 정화 의식이었습니다. 구원이었습니다. 설마 이보다 더한 바닥이 있겠어. 나는 희망을 희망해 보기로 했습니다. 허리띠를 졸라맸고 잔고를 최대한 아끼면서 늦더라도 철저하게 미래를 준비했습니다. 영어를 기초부터 다시 쌓고 대중음악 역사를 통째로 외우듯 공부했습니다. 그러던 와중 생에 단 한 번뿐인 기회가 찾아왔습니다. 그것을 온 힘을 다해 붙잡았습니다. 지금의 나를 있게 만든 바로 그 순간이었습니다.
결론입니다. 나는 문화와 예술이 돈과 지갑만큼 중요하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만약 돈을 우습게 보는 자가 있다면 나는 그를 우습게 봅니다. 그러나 인생을 살다 보면 돈으로는 결코 충족될 수 없는 영역이 있다는 것을 저절로 알게 됩니다. 경험에 의하면 이 빈 곳을 채울 수 있는 요소는 딱 2개로 정리됩니다. 사람과 예술입니다. 나는 이 둘을 내가 진짜 내가 될 수 있는 시간을 선물해 주는 것들이라고 부릅니다.
돈이 곧 이념이 되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내 삶의 컨트롤 키를 뺏겨서도 안 될 것입니다. 나는 다만 돈이 얼마나 귀한지를 깊이 이해하고 있는 사람이 되길 바랍니다. 내가 번 돈을 나를 위해 소비하면서도 주변을 위해 기쁜 마음으로 쓸 수 있는 사람이기를 원합니다. 이를 통해 진짜 내가 될 수 있는 시간을 마음껏 누릴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내 통장이 있으나 마나 했던 시절, 나를 위해 기꺼이 자기 지갑을 털어준 사람들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이제 내가 그들에게 보답할 차례입니다. 은혜를 갚는 까지가 되어 무수히 받았던 좋아요를 돌려줄 때가 왔습니다. 음악을 포함한 예술이 없었다면, 그리고 그들이 없었다면 나의 고통은 막막한 절망의 늪에서 그저 허우적대다 소외되었을 것입니다. 이게 다 돈이 없지는 않고, 철이 안 들지는 않은 덕분입니다. 지난 세월이 내게 선물해 준 지혜입니다. 조심스럽게 고백하자면 이미 꽤 갚았습니다. 현재 스코어 나쁘진 않은 인생이었구나 싶은 증거입니다. 장하다. 열심히 살아줘서, 참 고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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