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반응형

동화제약, 125년 기념 활명수 패키지사진
동화제약, 125년 기념 활명수 패키지사진

 

독일 바이엘사의 진통제 아스피린과 동갑이고, 코카콜라보다 11살 어리지만 켈로그의 시리얼보다 9살 위이고 유니레버사의 바셀린보다는 25살 어리며 최초 항생제 페니실린의 첫 발견보다는 31년 먼저 태어난 대한민국 최초소화제 활. 명. 수. "부채표가 없는 것은 활명수가 아닙니다."라는 카피로도 유명한 - 올해로 126년이 되는 국내 최고령 브랜드로 현재까지도 건재함을 보이며 '대한민국도 있다!'로 소개해 보는 토종브랜드 "부채표 활명수"에 대해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활명수의 탄생 

궁중선전관 노천 민병호

1890년대, 한양을 찾았던 한 외국인이 있습니다. 영국인 여행가 '이사벨라 비숍'. 그녀는 조선을 둘러보다 깜짝 놀랍니다. '조선사람들은 한 사람이 3, 4인분을 먹고, 4명이 앉으면 과일 20개~ 25개가 사라지는 것은 보통이야.' 당시 조선의 성인 남자가 먹은 밥의 양은 7홉 정도였는데 1홉이 180ml, 7홉이면 1260m(=1.25리터)나 됐습니다. 그러다 보니 급체하고, 토하고, 설사하는 등 토사광란으로 목숨을 잃는 사람이 많이 있었습니다. 이렇게 고통받는 민중의 모습을 보며 안타까워하는 이가 있었으니 고종황제 당시 궁중선전관이던 노천 민병호. 궁중선전관은 지금으로 치면 대통령 비서관 정도 되는 직책이었는데 그래서 궁중에서만 사용하던 생약 비방을 어깨너머로 배울 수 있었습니다. 또한 기독교 신자였기 때문에 서양의 선교사들로부터 서양 의학을 배울 수 있었습니다. 선전관직을 사임한 민병호는 1897년, 아들 민강과 함께 죽어가는 민중을 살리기 위해 궁중 생약 비방과 서양의학을 접목시켜 새로운 물약을 개발합니다. 그 물약이 바로 '생명을 살리는 물이라는 의미의 활. 명. 수.' 그리고, 같은 해 9월 25일, 민병호의 아들 민강은 한성부 서소문 차동, 지금의 서울특별시 중구 순화동 5번지 위치에 동화약방을 열고 활명수를 팔기 시작했고 활명수는 사람들로부터 '만병통치약'으로 불리며 불티나게 팔리기 시작합니다. 1910년대, 60ml 한 병에 50전 정도 했던 활명수는 설렁탕 두 그릇에 막걸리 두세 잔을 먹을 수 있을 정도의 비싼 가격이었음에도 날개 돋친 듯 팔리는 대박 상품이었습니다. 그래서 회생수, 소생수, 보명수, 활명회생수 등 활명수를 따라 만든 유사 제품들이 등장하기 시작했습니다. 동화약품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묘책으로 1910년 8월 15일, "부채표 활명수"의 상표 등록을 하게 되는데 이것이 '국내 최초의 상표 등록'이었습니다.

 

옛날 활명수, 오십전, 상표등록권
옛날 활명수, 오십전, 상표등록권

 

그렇게 부채표는 공식적인 활명수의 상징이 되어 지금까지 사용되고 있습니다. 여담으로 1919년에는 활명액에 대한 상표 등록을 하게 되는데 활명액이라는 새로운 상품을 만들었기 때문이 아니라 혹시나 유사 상표가 만들어지는 것을 방어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독립운동, 일제강점기, 독립자금으로 국가와 민족을 살리던 물

활명수는 독립운동에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동화약방을 설립한 민강은 국운이 기울던 1909년, 안희제, 김홍량, 김동삼, 오상근 등 80여 명과 함께 '대동청년단'을 조직하여 활동한 독립운동가였습니다.

 

독립운동가-민강, 안희제, 김홍량, 김동삼
독립운동가-민강, 안희제, 김홍량, 김동삼

 

1910년, 경술국치가 시작되자 민강은 남대문 밖에 소의 학교를 세워 후세 교육에 힘을 쏟았습니다. 그리고 동화약방의 가장 중요한 역할 중 하나는 상해 임시 정부와 비밀리에 연락을 담당했던 '서울연통부' 사무실이었습니다. 1920년대에는 판매 수익의 일부를 임시정부 운영 자금으로 지원했는데 당시 독립운동을 지원하지 못하도록 철저히 감시하고 있었고, 그러던 일제의 눈을 어떻게 피할 수 있었을까? 민강은 현금 전달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고 묘안을 생각해 냅니다. 그리고 그 방법으로 활명수를 만주로 지금 말로 수출을 결정합니다. 만주 현지에서 활명수를 팔아 현금을 마련하고 그 현금을 임시정부 운영비로 사용하는 방법을 생각해 낸 것입니다. 활명수의 효능 덕분에 만주에서도 아주 잘 팔렸고 활명수의 수익금은 독립운동에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망명, 순국, 경영악화 그리고 보당 윤창식

그러던 1919년 11월 민강은 고종의 아들 이강을 상해 임시정부에 참여시키기 위한 망명 계획을 추진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일본 경찰의 이 사실이 발각되면서 민강은 체포당하게 되고 1년 6개월간의 옥고를 치러야 했습니다. 출옥 후에도 후세 교육에 힘쓰며 항일 투쟁을 계속해오다 다시 일본 경찰에 체포당하게 되고 1931년, 결국 옥중에서 순국하게 됩니다. 민강이 세상을 떠나게 되면서 동화약방의 경영도 점차 어려워지게 됩니다. 1만 원이 현 시세로 1억 원 정도 되던 1936년 당시 동화약방의 매출은 4만 3천 원 정도였는데 부채는 8만 원을 육박하며 파산할 위기에 처했습니다. 그러던 1937년, 보당 윤창식이 동화약방을 인수하게 됩니다. 그 또한 독립운동가로 많은 활동을 했던 민강의 애국동지였는데 그는 회사가 어려워지면 나라를 구하는 일도 어려워진다고 생각했고 회사를 재건하기 위해 전문경영인을 영입하고 사규를 제정하는 등 체계적인 경영을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1937년 7월 27일, 활명수는 만주국에 정식으로 특허를 출원하게 되면서 '국내 최초로 해외 상표 등록'을 한 제품이 됩니다. 윤창식의 진두지휘 하에 활명수는 고속 성장해 가고 있었는데 1945년, 광복 이후 이어진 6.25 전쟁을 통해 한반도 북부와 만주국 시장을 잃게 되고 서울 순화동에 있던 공장도 파괴되며 또다시 위기를 맞이했습니다.

 

라이벌의 탄생 

부채 VS 왕관

윤창식은 약품을 팔아 남긴 이윤을 모두 사업에 재투자하는 방식으로 다시 회사를 회복시켜 갔습니다. 그리고 1962년 동화약품 공업 주식회사로 상호를 변경합니다. 그런데, 1965년 활명수 앞에 엄청난 적수가 등장합니다. 삼성제약에서 만든 '까스명수'. 당시 콜라나 사이다 같은 탄산의 청량감을 즐기는 사람들이 많아지면서 액상소화제에 탄산을 주입해 만든 까스명수는 인기를 끌며 활명수를 제치고 판매율 1위를 차지합니다. 참고로, 까스명수를 만든 삼성제약은 우리가 아는 그 파란 타원의 삼성이 아닙니다.

 

부채표 까스활명수 VS 왕관표 까스명수
부채표 까스활명수 VS 왕관표 까스명수

 

아무튼, 동화약품도 결국 활명수에 탄산을 넣기로 결정하고 1967년 2년간의 연구 끝에 까스 활명수를 출시하며 '까스활명수 대 까스명수'의 대립 구조가 만들어집니다. 까스명수는 까스 활명수가 출시되자 탄산소화제에 있어서는 원조라는 것을 강조하며 '까스명수를 사실 때는 왕관표를 확인하셔요.' 왕관표를 상징으로 내세우며 광고를 시작하였고, 같은 가격인 20원에서 1967년 4월 30원으로 가격을 올리며 프리미엄 브랜드 전략을 펼쳤습니다. '30원이 아닌 것은 까스 명수가 아닙니다.' 하지만, 70년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던 활명수의 브랜드 파워 덕분에 까스 활명수는 출시 2년 만에 1위를 쟁탈하게 됩니다. 그리고, 1990년대에 드디어 그 유명한 광고가 등장합니다. "부채표가 없는 것은 활명수가 아닙니다."

 

1990년대 부채표 까스활명수 TV광고
1990년대 부채표 까스활명수 TV광고

 

그런데 저도 내용을 정리하다 보니 발견한 카피 내용에서 '까스 명수를 사실 때는 왕관표를 확인하세요.', '30원이 아닌 것은 까스 명수가 아닙니다.' 라는 이 두 카피를 까스 활명수에 맞춰 바꾼 것은 아닐까 하는 의문이 들었지만 확인된 것은 없습니다. 아무튼 "부채표가 없는 것은 활명수가 아닙니다." 라는 이 광고는 까스 활명수를 확실하게 '브랜딩'했고 까스 활명수는 승승장구했습니다. 그런데, 2011년이 되자 변수가 발생했습니다. 정부에서 의약외품을 지정했고 지정된 소화제나 감기약 중 일부를 편의점이나 마트에서 판매할 수 있도록 허가한 것입니다. 그리고 까스 명수는 의약외품으로 분류됐지만 현호색이라는 약초가 들어간 까스 활명수는 의약품으로 분류되면서 까스 명수만 마트나 편의점에 입점하게 됩니다. 하지만 동화약품은 재빨리 편의점에서 판매할 수 있는 까스 활를 만들어 까스 명수를 견제했는데 실제로 까스활는 밤 10시부터 새벽까지 약국이 영업하지 않는 시간대에 상당히 많이 팔렸고 전체 활명수 매출의 30%를 차지하고 있다고 합니다.

 

어둠의 그림자 - 불법 리베이트 사건

독립운동가로부터 시작된 훌륭한 기업이었지만 어두운 면도 존재했습니다. 2013년 우리나라 역사상 최악의 불법 리베이트 사건이 발생합니다. 동화약품은 2010년 1월부터 2011년 12월까지 전국 1125개 병원과 의원에 의약품 처방을 대가로 명품 지갑을 선물하거나, 원룸 보증금과 월세를 내주거나, 홈시어터 골프채 등 무려 50억 7천만 원의 리베이트를 줬습니다. 사실, 제약업계의 리베이트는 관행처럼 해오고 있었는데, 의료법상 전문의약품은 소비자 광고가 금지되어 있고 처방권은 의사들에게만 있었기 때문에 제약회사들은 처방권이 있는 의사에게 리베이트를 주며 자기네 제품을 처방해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그러면서 약값의 리베이트 비용이 반영되기도 하면서 이를 막기 위해 2010년부터 '리베이트 쌍벌제'를 시행했습니다. 리베이트를 받는 사람도 처벌받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동화약품은 이때부터 리베이트를 본격적으로 시작했던 겁니다. 결국 동화약품은 8억 9800만 원의 과징금을 부과받았고 몇 년간 매출이 저조한 상황을 견뎌야 했습니다.

 

우리도 있다! 126년 토종브랜드 

1910년, 국내 최초로 상표 등록을 했던 "부채표 활명수" 대한민국 국민 4800만 명이 1인당 175병 이상을 마신 활명수는 1967년 '까스명수'를 대적하기 위해 '까스 활명수'가 출시됐으며 1968년에는 음주를 위해 만들어진 '알파 활명수'가 출시됩니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디자인이 조금씩 변해갔고, 1982년에는 '활명수'를 한글로 표기하기 시작했으며 점차 디자인이 세련돼지기 시작하더니 2009년 다시 활명수를 한자로 표기합니다. 이후 까스활, 미인활명수, 꼬마활명수 등이 출시됐습니다. 민족기업으로 굳건히 그 자리를 지켜온 동화약품은 지난 역사 속에 '밝음과 어둠'이 공존하지만 그래도, 활명수에 쓰이는 부채 모양의 상표는 "민족이 합심하면 잘 살 수 있다"라는 민족정신을 내포하고 있듯이, 120년 넘게 국민들의 사랑을 받을 수 있었던 이유인 것 같습니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