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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션계에 혜성처럼 등장해 20대 초반 디올의 디자인을 책임지고, 훗날 자신의 이름을 걸고 패션 왕국을 건설한 혁명가이며, 천재 중에 천재였던 이브 생 로랑(Yves Saint Laurent). 수많은 명작을 탄생시키며 패션의 역사를 바꾸었습니다. 존경합니다.
수줍음 많은 아이에서 혁명가로
입생로랑. 정확한 표기로는 '이브 생 로랑(Yves Saint Laurent)'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패션 디자이너 중 한 명이며 그의 디자인은 20세기 역사의 일부를 장식했다는 해도 과언이 아니라는 평을 받고 있습니다. 1936년 8월 1일 당시 프랑스의 식민지였던 알제리 오랑에서 태어난 그의 본명은 이브 앙리 도나 마티유 생로랑. 보험 회사와 극장을 운영하는 아버지와 사랑 많은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금수저 입생로랑은 어릴 때부터 문학과 예술에 관심이 많았는데 특히 어머니가 보시던 패션 잡지에 빠져 있었습니다. 그가 11살이 되던 1947년 루이 쥬베가 연출한 연극 '아내들의 학교'를 보게 되었는데 프랑스의 화가이자 디자이너였던 크리스티앙 베라르가 디자인한 작은 정원과 침실 샹들리에 등으로 구성된 무대 세트와 섬세한 고전 의상을 보고 깊은 인상을 받아 디자이너의 꿈을 꾸게 됩니다.
종이인형 만들기
오트 쿠튀르(haute-couture) 프랑스어인데 직역하면 '고급의상점' 패션 업계에서 주로 사용하는데 고급 디자이너의 옷을 뜻합니다. 17살이던 입생로랑은 종이로 자신만의 오트 쿠튀르를 만듭니다. 어머니가 보던 패션 잡지에서 좋아하는 모델의 실루엣을 가위로 오려낸 뒤 잉크와 수채화 물감으로 직접 종이옷을 만들어 모델들에게 입히며 종이 집에 옷장을 채워 나갔는데 이 종이집을 '이브 마티유 생 로랑 오트 쿠튀르 플레이스 방돔'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리고 그는 어머니의 드레스와 옷을 몰래 잘라 자신의 모델 인형들에게 입힐 옷을 만들어 인형 패션쇼 놀이를 즐겼는데 어렸을 적부터 그는 패션에 대한 관심과 재능이 남달랐습니다.
천재의 태동 - 국제양모사무국 디자인 콘테스트 1위
17살이던 입생 로랑은 그동안 그렸던 코트, 드레스, 슈트 등의 디자인 스케치를 국제 양모사무국의 디자인 콘테스트에 출품하게 됩니다. 이 대회는 패. 알. 못도 들어봤을 만큼 유명한 콘테스트로 심사위원으로는 디자이너 크리스천 디올과 위베르 드 지방시 등이 있었습니다. 이 대회에서 입생로랑은 무려 3등을 차지하게 됩니다. 그리고 시상식에서 보그 편집장인 미시엘드 브르노프를 만나게 되는데 입생로랑의 재능을 눈여겨본 그는 이후 큰 도움을 주게 됩니다. 디자인과 재단을 제대로 공부하고 싶었던 입생로랑은 파리의상조합에 입학하는데 지루한 정규 디자인 수업에 실망하여 3개월 만에 자퇴하게 되고 다시 국제양무국 디자인 콘테스트에 참가하면서 1등을 수상하게 됩니다.
디올(Dior) 데뷔
1955년 입생로랑은 보그 편집장 미셸드 브르노프를 만나 자신의 새로운 스케치를 보여주게 되는데 스케치를 본 미셸은 깜짝 놀라게 됩니다. 입생로랑의 스케치가 아직 발표도 하지 않은 크리스천 디올의 디자인과 엄청나게 비슷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곧장 입생로랑을 크리스찬 디올에게 소개해 주는데 크리스찬 디올도 입생로랑의 스케치를 보고 그 자리에서 그를 어시스턴트 디자이너로 채용했습니다.
위 사진은 20세기를 대표하는 포토그래퍼 리처드 아베든의 코끼리와 도비마 입생로랑의 첫 디올 드레스 중 하나입니다. 1957년에는 디올의 가을, 겨울 컬렉션에서 35벌이나 되는 의상을 입생로랑이 디자인하며 디올의 가장 신뢰받는 디자이너로 자리 잡습니다. 그런데 그해 10월에 크리스천 디올이 심장마비로 갑자기 세상을 떠나게 되고 당시 21살이던 입생로랑은 디올의 수석 디자이너가 됩니다. 디올의 주 고객층은 보수적인 상류층 중년들이었습니다. 입생로랑은 고객들의 취향에 맞게 여러 디자인을 선보이며 점점 더 찬사를 받게 되는데 1958년 1월 디올에서의 첫 번째 컬렉션에서 '트라페지 드레스'를 선보이며 성공적인 데뷔 무대를 가집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상류층들만의 오트 쿠튀르를 지루해하기 시작하고, 1958년 8월에는 '아크라인(Arc Line)' 컬렉션을 발표하며 무릎까지 늘어지는 긴 기장과 실루엣을 제안합니다.
이를 본 젊은이들은 입생로랑의 디자인에 열광했는데 반면, 디올의 주 고객층인 중년들은 외면하게 됩니다. 입생로랑은 이상과 현실 사이에서 많은 고민을 하게 되는데 그렇게 세 번째 컬렉션에서 전통적인 '프리티 룩'을 선보이며 중년층의 지지를 다시 받고 네 번째 컬렉션에서는 무릎까지 딱 달라붙는 '호블 스커트(Hobble skirts)'를 내놓으며 다시 중년층에게 큰 충격을 선사하고 다섯 번째는 무난한 컬렉션을 선보인 뒤 여섯 번째 '베스트 컬렉션(Best Collection)'으로 디올의 보수적인 고객들을 경악시킵니다. 결국 디올의 소유주였던 마르셀 부삭은 입생로랑에게 군 입대를 권하게 되고 입생로랑은 그동안 미루고 있던 군 입대를 하게 됩니다.
혁명가의 탄생, 브랜드 '입생로랑'
입대한 뒤 알제리 전쟁에 나가게 된 입생로랑은 알제리가 식민지 해방을 위해 싸우는 모습을 보고 충격을 받는데 이후 신경세약의 이유로 20여 일 만에 전역합니다. 그 사이 디올에는 새로운 수석 디자이너가 뽑히면서 자연스럽게 입생로랑은 디올과 작별하게 됩니다. 당시 입생로랑 곁에는 연인인 피에르 베르제가 있었는데 그의 도움으로 1961년 이브 생 로랑의 이름을 딴 브랜드 입생로랑을 론칭하게 됩니다.
입생로랑은 보수적인 당시 시대 분위기 속에서 남성복의 구조와 착용감을 여성 옷에도 부여하게 되는데 그야말로 패션 산업을 뒤흔드는 혁명적인 여성복을 도입하게 됩니다. 그리고 상류층뿐만 아니라 더 많은 여성이 우아하고 저렴한 옷을 입길 원했고 그렇게 1966년 9월 26일 입생로랑 리브 고시 라이을 론칭 하며 부유층의 전유물이던 고가의 디자이너의 옷을 대중도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여성 기성복 의류 매장을 오픈합니다.
여성에게 자유를 - 최초의 여성 턱시도
당시 여성들은 공공장소에서 바지를 입지 못하고 여성미를 강조하는 옷들을 입는 것이 대부분이었습니다. 그런데 입생로랑은 이런 고정관념을 깨고 관습과 규제에 억압된 여성들에게 자유를 주는 디자이너였습니다. 르 스모킹(Le Smoking), 이는 턱시도의 프랑스어 이름이었는데 유럽에서 스모킹 재킷이라고도 불리던 이 턱시도는 원래 시가 담배 냄새로부터 옷을 보호하기 위해 흡연실에서 착용하던 남성들을 위한 옷이었습니다. 그런데 1966년 입생 로랑은 이 턱시도를 여성의 몸에 맞도록 긴 재킷과 스트레이트 팬츠 주름 장식이 달린 오건디 소재의 셔츠 너풀거리는 넥타이 세틴 소재의 벨트로 디자인된 르스모킹 룩을 제안하게 됩니다. 이후, 아프리카 남성이 착용하던 의복에서 영감을 받고 사파리 재킷을 만들고 남성 조종사들이 착용하던 옷을 여성을 위한 점프 스트로 선원들의 재킷, 농부들의 셔츠, 어부의 방수복 등 남성들의 옷을 여성을 위한 옷으로 제작하며 여성들에게 활동성과 자유로움을 줄 수 있는 옷들을 디자인합니다. 또한, 화가 몬드리안의 작품을 보고 영감을 받은 뒤 몬드리안 룩을 내놓으며 패션계 최초로 예술 작품과 패션을 접목시키기도 했으며, 속이 다 비쳐 보이는 시스루 시크 시폰 드레스 등은 페미니스트들의 지지를 받았을 뿐만 아니라 훗날 다른 디자이너에게 영감을 주는 중요한 모티브가 됩니다.
발상의 전환 - 발칙한 루루(La Vilaine Lulu)
빨강, 검정, 하얀색 이 세 가지 색만 이용해 귀여운 손글씨로 그린 '발칙한 루루'는 입생로랑이 20살이던 1956년에 그린 유일한 만화책입니다. 창작된 지 50년이 지났지만 지금도 감각적인 예술성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발칙한 루루는 통통하고 귀여운 외모와는 달리 언제나 '하면 안 되는 일'만 골라하는 개성 넘치는 캐릭터였는데 입생로랑이 디올에 있을 때 모델 의상실에 들어가서 마음대로 옷을 골라 입으면서 변장을 즐기던 장 피에르 프레르라는 동료의 모습에 영감을 받고 그리게 된 만화입니다. 루루의 행동은 기발하고 참신하지만 어찌 보면 파괴적이고 엽기적인 행동을 저지르는데 이 만화책을 보면 패션과 예술을 사랑한 열정 가득했던 거장의 장난기 어린 젊은 날의 감수성을 엿볼 수 있습니다.
패션계의 혁명가, 세상을 앞서간 천재, 잠들다
패션계의 혁명가로 불리며 활발한 활동을 펼치던 입생로랑은 2002년 1월 7일 은퇴를 선언하게 되는데 이후 파리 퐁피두 센터에서 마지막 오트쿠튀르 컬렉션을 열었습니다. 그 후 파리에서 지내던 입생로랑은 2008년 6월 1일 뇌종양으로 생을 마감하게 되는데 사실 그는 자신의 병명을 알지 못했다고 합니다. 정밀 검사 후 베르제가 의사를 만나 결과를 듣게 되는데 뇌종양 말기로 1~2주 밖에 더 살 수 없다는 얘기를 듣고 입생로랑에게는 결과를 숨기기로 결정한 것입니다. 베르제는 입생로랑이 임박한 죽음을 받아들일 만큼 강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했다고 합니다.